최근 물가안정 동참을 위해 ‘담뱃값 동결’을 선언한 KT&G(대표이사 사장 민영진)가 ‘통 큰 결정’에도 욕을 먹고 있다. 소속직원들이 폐기 대상인 담배 23만 갑, 시가 6억여 원어치를 빼돌려 보따리상에게 몰래 팔아넘긴 사실이 드러난 탓이다.
‘윤리경영’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던 KT&G는 직원들의 심각한 도덕적 헤이를 묵과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더구나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떨이장사’에 나선 이유가 본사의 판매실적 압박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와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판매실적이 좋아야 승진과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KT&G의 구조적인 모순이 직원들을 범죄자로 내몰았다는 얘기다.
- 지점장급 간부 등 폐기용 담배 빼돌려
- 본사 ‘판매실적 압박’에 범죄자 전락
- “실적 좋아야 승진·인센티브 보장”
이번 사건으로 경찰에 적발된 KT&G 직원은 모두 37명이다. 이 가운데는 지점장급과 과장급 간부 13명도 포함됐다. 이들은 제조일자가 한참 지나거나 출시가 중단돼 소각 지시가 내려진 담배를 몰래 빼돌려 무등록 판매업자 일명 ‘보따리상’에게 헐값에 팔아넘긴 혐의다.
이렇게 유통된 ‘불량 담배’는 경찰에 확인된 것만 22만9000갑(레종 레드·458박스)에 달하며 이를 시가로 환산하면 5억7000여만 원어치에 이른다.
조직적 범죄 불구, 개인 착복 없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 22일 사기 등 혐의로 KT&G 직원 3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이들로부터 담배를 헐값에 사들여 안마시술소 등 유흥업소와 담배자판기 등을 통해 유통시킨 업자 최모(53)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최씨 등은 직원들에게 문제의 담배를 반값에 사들여 정상가격에 되파는 수법으로 5억7000여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적발된 직원들 중 일부는 최씨 등으로부터 술접대를 받는 등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온 정황도 포착됐다.
문제는 적발된 직원들이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일부 직원들의 개인 비리로 치부하기엔 범죄 규모와 수법이 지나치게 ‘프로급’이라는 얘기다.
이들은 비정상적인 유통 과정을 숨기기 위해 ‘대포통장’을 이용했다. 대포통장은 금융경로 추적을 피해 제3자의 명의를 도용해 만든 계좌로 주로 탈세나 금융사기 등 범죄에 이용된다.
보따리상에게 판 담배 대금은 이 대포통장을 통해 전달됐으며 문제 직원들은 빼돌린 담배들이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소매점에 공급된 것처럼 거래명세서와 세금계산서까지 조작했다. 여러 소매점에 조금씩 배분해 허위로 회계처리를 하고 판매대금은 모두 KT&G 본사에 판매실적으로 기록됐다.
KT&G 측은 이에 대해 “문제가 된 담배는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신제품이 출시돼 소각하기로 한 것”이라며 “판매대금은 정상 회계처리 됐고 이를 개인적으로 착복한 직원들은 없다”고 밝혔다. 이는 범죄수익을 KT&G 본사가 정당한 이익으로 받아 챙겼다는 것으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KT&G ‘뒷북 징계’ 논란
한, 두 명도 아닌 직원 수십 명이 2009년 중순부터 최근까지 회사 창고를 털었는데도 본사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범죄로 벌어들인 돈이 정당한 회사수익으로 ‘세탁’됐다는 것은 다양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KT&G가 회사 물품과 직원관리에 지나치게 소홀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알면서 방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KT&G 측은 경찰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해당 직원들을 징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KT&G 관계자는 “불미스러운 일로 소비자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할 뿐”이라며 “경찰 조사가 완료되는 즉시 해당 직원에 대해 엄중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KT&G의 판매수익으로 정상 처리된 범죄수익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침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경찰은 ‘불량 담배’가 시중에 더 유통됐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각 지점별 판매 실적 경쟁이 치열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담배를 판매하려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며 “판매실적이 각종 인사평가와 인센티브 지급의 기준이 되고 있어 회사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담뱃값 동결, 원가부담 내부 흡수”
한편 경쟁사인 BAT코리아가 던힐과 켄트, 보그 등 주력상품의 가격을 오는 28일부터 200원 올린 2700원에 팔겠다고 밝힌데 대해 KT&G 측은 “가격인상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사실상 담뱃값 동결을 시사했다.
KT&G 측은 지난 22일 “원가부담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담배세 인상이 없이 가격을 인상하기는 어렵다”며 “원가부담은 내부 구조조정 등 조직 효율성 제고를 통해 흡수해왔고 가격인상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KT&G는 2004년 12월 담배세 인상을 계기로 가격을 한 갑에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올린 이후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업계에서는 경쟁사의 가격 인상 결정으로 KT&G 역시 인상 시류에 동참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물가억제 기조가 분명한 가운데 담뱃값이 물가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공기업적 성격이 강한 KT&G로서는 섣불리 인상안을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